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가디슈 전투 (문단 편집) ==== 소말리아 혁명 ==== 하지만 1986년부터 시아드 바레가 자신의 친위세력인 레드 베레[* 소말리아 식으로는 Duub Cas.]를 동원해서 다른 지역을 공격하면서 이제는 상황이 중부와 남부로 번져서 이른바 소말리아 혁명이 시작된다. 이 시기를 '소말리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시아드 바레 정권을 몰아내는 것은 미국 정도를 제외하면 서구권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시아드 바레 정권이 대내외적으로 워낙에 개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이게 이후에 [[소말리아 내전]]으로 변하면서 평가가 다시 다운된다. 여기에 전염병이 돌아서 축산업이 무너지면서 인플레이션을 포함한 경제위기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아드 바레]]는 당연히 권력을 내려놓기 싫다고 발악했다. 1988년에는 이자크 족의 중심도시인 하르게이사와 부라오를 공격해서 나라가 완전한 내전 상황이라는 것을 자인했고, 1989년 7월에는 수도인 모가디슈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대시위를 탄압하고 반정부 지도자 2000명을 체포하였으며, 1990년 1월에는 '''축구장에서 관중들이 정부에 야유를 한다는 이유로 대통령 경호원들이 무차별 발포'''해서 60여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런 행동으로 시아드 바레 정권은 '''UN에게 아프리카 최대 인권침해 국가'''로 완벽하게 낙인찍힌다. 1989년에는 소말리애국운동(Somali Patriotic Movement, 약칭 SPM)이 다른 곳도 아니고 '''바레의 부족이자 정치적 지지층이었던 오가덴족'''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1990년에는 마침내 소말리아 최대 부족인 하브예 부족의 통일소말리의회(United Somali Congress, 약칭 USC)가 결성된다. 이런 전개에 대해서 유엔 개발계획(UNDP)은 '''시아드 바레의 21년 독재를 아프리카 최악의 인권침해사례'''로 꼽았고, 국제 엠네스티 역시 시아드 바레 정부의 국가보안국(National Security Service, 약칭NSS)이 재판 없는 투옥, 전기고문을 포함한 고문과 강간 등을 일삼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1990년부터 소말리아에 대한 국제지원이 끊어졌다.''' 안 그래도 국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대외 원조와 지지도 끊겨버린 바레 정권의 영향력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그나마 수도인 모가디슈 중심으로 끈질기게 통치력을 유지했지만, 1990년 3월 결국 모가디슈에도 반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5월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 지경까지 갔음에도 정신을 못차린 바레는 10월 연료값 인상 시위에 대해서도 발포로 대응했다. 결국 1990년 12월 30일, 인근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고 있던 아이디드의 USC가 바레 정권의 최후의 보루였던 모가디슈를 함락하면서[* 이 시기 타국의 외교관들조차도 안전을 보장되지 못할 만큼 개판이 된 [[모가디슈]]의 상황과, 그 지옥도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데 성공한 남한 및 북한 대사 일행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바로 2021년 개봉한 [[모가디슈(영화)|모가디슈]]이다.] 시아드 바레 정권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모가디슈에서도 밀려난 시아드 바레는 자신의 남은 패거리들을 모아 USC를 향한 협상요청과 2회 정도의 수도탈환 시도로 추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실패, 1991년 1월 26일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이지리아]]로 도주하면서 22년 독재 정권의 막을 내렸다. 이후 그는 1995년 망명지인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